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쿠초라 (문단 편집) === 선수 경력 === 쿠초라는 1923년 [[FC 샬케 04]]에 입단했고, 1925년 평생의 친구 [[프리츠 스체판]]도 샬케에 입단시켰다. 이 둘의 입단으로 샬케는 서부 독일의 강자로 떠올랐고 1926년에는 서부 독일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. 그리고 이 무렵 쿠초라는 [[독일 축구 국가대표팀|대표팀]] 승선도 이루는 기쁨을 맛봤다. 1928년 쿠초라는 [[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|올림픽]] 대표팀 명단에 들었지만 경기는 뛰지 못했다. 쿠초라는 1930년에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에서 월 1,000마르크를 받고 뛰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팀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고, 대표팀에서도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. [[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|스위스]]를 상대로 [[해트 트릭]]을 기록하며 5대0의 대승을 이끌어냈고 당시 [[최종 보스]]였던 [[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|잉글랜드]]에 3대3으로 비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. 샬케는 가울리가가 창설될 무렵부터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고, 그 중심에는 쿠초라와 스체판이 있었다. 1933년 독일 축구 챔피언십 결승에서 [[포르투나 뒤셀도르프]]에 패해 준우승에 머무른 샬케는 다음 해 다시 결승전에 올랐다. 상대는 [[1. FC 뉘른베르크]]. 쿠초라는 [[탈장]]으로 고생하면서 결승전 출전을 강행하였고, 결승골을 넣으면서 샬케에 첫 독일 챔피언의 영광을 안겨주었다.[* 결승골을 넣고 나서 남겼다는 소감이 '[[제프 허스트|어디로 차야할 지 몰라서 걷어냈다]].'였다. 그런데 이 경기 [[캄프 누의 기적(1999년)|후반 43분까지 0대1로 지고 있다가 스체판과 쿠초라가 2분만에 1골씩 넣어 2대1로 역전한 경기]]이며 샬케의 첫 우승 경기였다. 캄프 누의 기적에서 결승골을 넣은 [[올레 군나르 솔샤르]]의 소감이 이런 식이라면 축구계는 다른 의미로 뒤집어졌을거다.] 그 이후 샬케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. 11회 연속 가울리가 베스트팔렌 우승을 바탕으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 6회 우승을 달성했으며, 특히 1937년에는 [[DFB-포칼]]도 우승하면서 독일 클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[[더블#s-7]]을 기록하였다. 하지만 샬케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쿠초라는 대표팀에서 12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는데, 그 이유는 대표팀 감독 [[오토 네르츠]]가 [[롱볼축구]]를 선호해서 [[자이로스코프]]라 불릴 정도로 빠르고 유기적인 숏패스 플레이를 펼쳤던 당시 샬케 선수들과 성향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. 쿠초라는 샬케를 27년간 지키다 1950년, 45세에 축구화를 벗었다. >'''클럽통산 450경기 419골'''[* 현재까지 [[FC 샬케 04|샬케]]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